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
2025년 8월 26일
경제·금융·기술 분야에서 쓰이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만들고, 그 틀은 정책 방향, 투자자의 의사결정, 언론의 서술 방식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규제의 범위가 달라지고, 시장이 형성되는 방식도 달라진다. 결국 용어의 선택은 전략의 선택이며, 산업을 주도하는 세력이 시장 언어를 장악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용어 변화가 보여주는 권력 지도 : '암호화폐'vs'가상자산'vs'디지털자산'
2009년 비트코인의 등장은 '암호화폐(Cryptocurrency)'라는 이름과 함께 출발했다. 당시 주도권은 개발자와 기술 커뮤니티에 있었고, 이들은 중앙정부의 화폐 발행권 독점에 맞서는 탈중앙화의 철학을 내세웠다. '암호화폐'라는 말은 곧 암호학적 보안성과 네트워크 자율성을 상징했고, 사용 행위 자체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선언이었다.
그러나 2017년, 가격 폭등과 ICO 열풍을 계기로 각국 정부와 규제기관은 위험성과 불법 가능성을 강조하며 '가상자산(Virtual Asset)'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2019년 이를 국제 기준으로 확립하면서, 규제·감독·과세의 틀이 공식화되었다. 기술적 이상은 뒤로 밀려났고, 위험 관리와 통제가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2020년대, 글로벌 금융기관과 대형 운용사들이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디지털자산(Digital Asset)'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블랙록, 피델리티, JP모건, 골드만삭스 등은 블록체인 기반 자산을 금융 인프라로 정의하며, 암호화폐를 넘어서 토큰화 증권(STO), 디지털 채권, 실물자산 토큰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가상'이라는 뉘앙스를 지우고 제도권 금융의 언어로 흡수한 셈이다.
'이름 바꾸기'는 곧 전략의 전환
산업의 주도권은 언제나 용어를 선점한 세력이 차지한다. '인터넷 전화'가 'VoIP'로, 'P2P 대출'이 '온라인투자연계금융'으로 바뀌며 규제와 시장 구조가 재편된 것처럼, 암호화폐 산업의 용어 변화는 권력 이동의 기록이다.
'암호화폐'에서 '가상자산', 다시 '디지털자산'으로 이어지는 궤적은 기술 이상주의에서 규제 관리 체제로, 그리고 제도권 금융의 통합 전략으로 이동한 가치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름은 산업의 정체성과 제도적 운명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길잡이다.
따라서 차트나 지표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이름'의 변화를 살펴야 한다. 어떤 세력이 규칙을 만들고, 시장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가 이름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용어를 읽는 능력이 곧 시장의 미래를 읽는 힘이다. 오늘날 '스테이블코인'이나 '디지털자산' 같은 새로운 금융 용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